- 김법혜 스님(민족통일불교중앙협의회 의장)
▲ 김법혜 스님 |
고전여담에 필부무죄 회벽기죄(匹夫無罪 懷璧其罪)란 말이 나온다. 한자로 쓰면 천한 사람 필(匹), 사내 부(夫), 없을 무(無), 허물죄(罪). 품을 회(懷), 둥근옥 벽(璧), 그 기(其), 허물 죄(罪)자이다. 한 마디로 풀어쓰면 “보통 사람은 죄가 없지만 옥을 가진 게 죄다”란 뜻이다. 죄 없는 사람도 분수에 맞지 않는 보물을 지니면 도리어 재앙을 부르게 됨을 비유해 이르는 말이다.
이 고전여담은 기원전 700년경부터 약 250년간 중국 춘추 시대를 기록한 역사서인 ‘춘추’에 좌구명이 주석을 단 ‘춘추좌씨전’ 환공 10년에 나온다. 춘추시대 열국의 흥망과 패권의 추이를 기록한 ‘춘추좌씨전’은 ‘춘추곡량전’, ‘춘추공양전’과 함께 ‘춘추삼전’으로 불렸다.
동의어로 회옥유죄, 포벽유죄도 있다. 환공 십년 가을, 우(虞)나라를 다스리던 우공은 동생 우숙이 갖고 있는 이름난 옥(명옥)을 몹시 탐냈다. 우숙은 처음에는 아까워서 주고 싶지 않았다. 하지만 곧 마음을 고쳐먹고 다음과 같이 말하며 형에게 구슬을 바쳤다. “주나라의 속담에 ‘필부는 죄가 없어도 구슬을 갖고 있으면 그것이 곧 죄가 된다’라고 했다. 내가 이것을 가져서 스스로 화를 불러들일 이유는 없을 것이다” 보통 사람의 신분으로 옥을 가지고 있는 것은 훗날 화를 초래할 수 있다는 것으로, 우공에게 건넨 것은 화근을 넘겨준 것이라는 말이다.
하지만 우공은 이에 만족하지 않고 우숙에게 그가 지닌 보검도 달라고 했다. 그러자 우숙은 “이는 만족할 줄 모르는 것이다. 만족할 줄 모름은 장차 나 자신에게까지 미칠 것이다”라며 반란을 일으켰다. 동한의 왕부는 ‘잠부론’에서 “코끼리는 상아 때문에 몸을 태우고, 큰 조개는 구슬 때문에 몸을 가른다”라고 했다.
욕심이 과하거나, 능력과 분수를 넘어서는 물건이나 행동은 반드시 후환을 초래하는 법이다. 요즘 정치권을 보면 진영끼리 모여 성을 쌓고 전근대적인 공성전만 벌이기 일쑤다. 틈만 나면 조우전까지 벌이고 있다. 네 편 내 편 나눠 싸우는 ‘닫힌 사회’에서는 길이 있어도 보이지 않는다.
모두가 성에 갇혀 스스로 벽이 되고 만다. 하지만 살아가면서 과욕은 금물이다. 욕심이 지나치면 화(禍)를 자초하게 된다. 과(過)는 의미로 ‘가다’의 뜻인 辶(착)과 발음요소인 咼(입삐뚤어질 와)가 더해진 글자로 ‘지나다’의 뜻으로 쓰인다. ‘지나치다’, ‘허물’의 뜻은 파생되었다.
설문해자에서는 ‘지나가다[度也]’라 하였다. 욕(慾)은 의미요소로 ‘마음’의 뜻인 心(심)과 발음요소인 欲(하고자할 욕)이 더해진 글자로 ‘욕심’의 뜻을 나타낸다. 욕망은 ‘무엇을 하거나 가지고자 하는 마음’의 뜻이고 욕정은 ‘충동적으로 일어나는 욕심’의 뜻이다.
반대로 과욕은 ‘욕심이 적다’의 뜻이다. 과언과 과묵에서 보듯이 과는 적다는 뜻으로 쓰인다. 여기서 떠오르는 말이 과유불급이다. 과유불급은 공자와 그의 제자인 자공과의 대화에서 유래했다. 자공이 다른 제자인 자장과 자하 중 누가 더 나으냐고 묻자 ‘기상이 활달하고 진보적인 자장은 지나치고, 매사에 조심하여 모든 일을 현실적으로 생각하는 자하는 미치지 못한다’고 했다.
이에 ‘자장이 더 낫습니까?’하고 반문하자 공자는 ‘과유불급’이라 했다. 과유불급은 지나침만 말하는 것이 아니라 미치지 못하는 것도 말하는 것이다. 이른바 不狂不及(미쳐야 미친다.)는 극단의 도가 아니라, 중용의 도를 말하는 것이다. 중용지도(中庸之道)는 어디에서 오는가? 소통과 수렴에서 온다. 누구나 나라를 위하고 국민을 위한다고 말하면서도 소통이 안 되는 이유는 그 때문이다.
소통은 이처럼 나와 상대방의 마음에 다리를 놓는 일이다. 눈에 보이는 다리를 놓기도 어렵지만 보이지 않는 다리를 놓기는 더욱 어렵다. 소통의 다리는 내가 쓰는 말이 아니라 상대방이 쓰는 말이 재료가 될 때 튼튼하게 세워지는 것이다. 그래서는 안 된다.
로마는 포용 없이 이뤄지지 않았다. 모두 수렴하고 감싸 안았다. 오만한 태도로 민생과 겉도는 적지 않은 정치 지도자들이 새겨야 할 대목이다. 그런데 요즘 정치권을 보면 진영끼리 모여 성을 쌓고 전근대적인 공성전만 벌이기 일쑤다. 틈만 나면 조우전까지 벌이고 있다.
네 편 내 편으로 나눠 싸우는 ‘닫힌 사회’에서는 길이 있어도 보이지 않는다. 모두가 성에 갇혀 스스로 벽이 되고 만다. 그래서는 안 된다. 로마는 포용없이 이뤄지지 않았다. 수렴하고 포용해야 한다. 다이버시티 인투 유니티(diversity into unity)로 승화시켜야 한다.
과욕(過慾)과 과욕(寡慾)의 의미를 되새겨보는 이유이다. 때문에 우리도 수렴하고 포용하는 자세가 절대적이다.
이선민 기자 cmni@hanmail.ne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