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임명섭 충남일보 주필
▲ 임명섭 충남일보 주필 |
천고마비(天高馬肥), '하늘은 높고 말은 살찐다'라는 뜻으로 오곡백과가 무르익고 활동하기 좋은 가을 계절을 일컫는 말이다. '가을은 풍요의 계절이다'란 의미의 고사성어인데 해당된 표현으로 기원은 정확하게 알려져 있지 않다.
중국에서는 북쪽의 광대한 들판에서 봄풀, 여름풀을 배불리 먹은 말은 가을에는 살이 쪄서 타고 달리면 달릴수록 힘이 생겼다고 했다. 여기서 생긴 고사성어로, 중국에서 비슷하게 추고마비(秋高馬肥)라는 표현도 있다.
추고마비 또한 그 유래가 확실하지 않다. 조선실록에서도 추고마비라는 표현은 등장하지만 천고마비라는 표현도 찾아보기 어렵다. 지금은 천고마비가 가을 날씨를 칭송하는 뜻으로 쓰이지만 본래는 공포의 고사 '추고마비'에서 유래됐다고도 한다.
고대 왕조인 은나라 때부터 중국 북방은 흉노족으로 골머리를 앓았다. 척박한 초원을 근거지로 유목생활을 해온 흉노들은 물자가 풍부한 농경지대를 약탈해 기나긴 겨울 동안의 양식을 마련했다. 이 때문에 무려 2000년 동안 흉노들은 중국인들과 맞서 공포의 대상으로 살았다.
하늘은 높고 말이 살찌는 가을만 되면 언제 흉노의 침입이 있을지 몰라 전전긍긍했다. 중국 황제들은 흉노의 침입에 효과적으로 대처하는 것이 가장 큰 과제였다. 워낙 큰 골칫거리다 보니 춘추전국시대 연나라, 진나라, 조나라는 흉노를 막기 위해 각기 북쪽 변경에 장성을 쌓기도 했다.
진나라의 시황제가 천하를 통일하면서 이 장성을 연결해 지금의 만리장성이 됐다. 당시의 흉노가 너무 강력했기 때문에 정부에서도 제대로 보호해 줄 수 없어서, 태원 상당 지방, 심지어는 낙양 근처까지 매년 빼앗기고 죽고 납치당하는 게 연례행사였다.
유목 민족의 위협이 사라진 지금은 '천고마비의 계절~' 운운하는 식으로 가을의 정취를 상징한다. 천고마비의 계절 '가을' 하면 다양한 먹거리가 떠오른다. 그중 빼놓을 수 없는 것으로 '햅쌀밥'이다. 황금들판을 이루는 농촌의 풍경이 주는 풍성함도 있지만, 무엇보다도 햅쌀로 지은 밥맛이 가장 좋을 시기이다.
쌀밥을 먹는 나라는 많이 있지만, 밥맛으로 따지면 우리나라가 단연 으뜸이다. 예로부터 우리나라는 밥을 맛있게 짓는 것으로도 잘 알려졌다. '조선 사람들은 밥 짓기를 잘한다. 밥알에 윤기가 있고 부드러우며 향긋하고 솥 속의 밥이 고루 익어 기름지기도 하다.'
쌀을 물에 불려 밥을 짓는 우리 솜씨가 탁월했기 때문이다. 특히 햅쌀밥이 맛이 좋은 이유는 처음 수확한 곡식이라는 기분 탓도 있지만 여기에도 과학적인 이유가 있다. 쌀은 도정 후 7일이 지나면 산화가 시작되며, 15일이 지나면 맛과 영양이 줄어든다.
또 쌀의 수분이 16%일 때 밥을 지으면 가장 맛있다고 알려져 있는데, 갓 수확해서 도정했을 때의 수분이 그 정도라고 한다. 역사적으로 보면 옛날에는 훨씬 더 많은 쌀을 소비했다. 최근 몇 년간 한국의 쌀 소비량이 사상 최저치를 기록하고 있다.
'밥이 보약'이라는 말이 있다. 과거에는 가을이 되면 먼저 '천고마비'를 외쳤다. 그런데 지금은 높은 하늘 보고 말(馬)을 연상하는 사람은 거의 없다. 말에 대한 관심도 없고, '살찌는'이라는 말도 그렇다. 더군다나 '맑고 풍요로운 가을'을 얘기할 때는 더더욱 외면한다.
옛날에는 많은 쌀을 소비됐다. 조선 후기 기록에 따르면 성인 남성이 한 끼에 쌀을 섭취하는 양은 약 420㎖이고, 당시의 밥그릇 높이는 9㎝, 지름은 13㎝ 정도였다. 하지만, 오늘날 밥그릇의 용량은 일반적으로 290㎖에 불과하다. 사람들이 한 끼에 쌀을 조상들 때보다 3분의 1 정도 먹는다는 것을 의미한다.
때문에 쌀 소비량이 사상 최저치를 기록하고 있다. 1인당 쌀 소비량은 56.4㎏, 하루 소비량으로 환산하면 154g, 즉 쌀 한 공기 반 정도에 불과하다. 쌀을 덜먹게 된 이유에는 다양한 요인이 있다. 먼저 육류 소비가 늘어 쌀 소비량보다 많아졌다
또 샐러드, 샌드위치 등 간편식품을 선호하는 것도 쌀 소비가 줄어든 원인이다. 또 탄수화물에 대한 부정적 인식도 있다. 쌀은 흔히 탄수화물 공급원으로만 알려졌지만, 칼슘, 철, 마그네슘 등 필수 미네랄을 상당량 함유하고 있어 영양학적으로도 우수하다.
우리나라는 식습관의 서구화로 쌀 섭취량이 감소하고 있는 반면, 미국에서는 건강식으로 쌀이 주목을 받고 있다. '밥은 곧 탄수화물이고 살이 찐다'는 잘못된 인식을 갖는 이들이 많다. 그러나 쌀에 포함된 당질은 에너지 소비에 우선적으로 사용되어 오히려 비만 예방에 효과적이라고 한다.
아침 쌀 소비량 감소율이 점심, 저녁 소비량 감소율의 두 배인 6.4%로 나타났다. 황금들판의 자연이 주는 선물 '햅쌀밥'으로 하루를 시작하며 건강을 가꿔보길 권해본다. 천고마비의 기운이라면 이 위기를 슬기롭게 극복해 낼 수 있지 않을까 하는 희망찬 상상을 해본다.
농민들이 씨앗을 뿌리고 그 씨앗이 자라 수확의 결실을 맺기까지 농민들이 4계절 얼마나 많은 땀을 흘리고 지켰는지를 생각하면 그 답을 쉽게 얻을 수 있을 것이다.
이선민 기자 cmni@hanmail.ne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