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이상호 전)천안아산경실련 대표, 소소감연구소 소장
▲ 이상호 전)천안아산경실련 대표 |
엄한 아버지와 자상한 어머니는 자녀가 균형 있는 성격으로 성장하는데 중요한 역할을 한다. 여기서 엄함이란 무서움이 아니라 분별과 절도가 있는 것을 말하며, 자상함이란 분별 있는 부드러움이다. 이른바 합리성과 사랑, 정의와 온정의 조화라 할 수 있다. 조직의 리더가 정의와 온정이 조화를 이루는 리더십을 발휘할 때 구성원은 업무에 역동성을 지닐 수 있다. 상해 임시정부에서의 이동녕 선생은 분별 있는 온정의 자애로운 어머니 같은 인물이었다. 함께 독립운동을 했던 한기악(韓基岳, 1898〜1941)은 이동녕 선생의 이러한 성품에 대하여 다음과 같이 말했다.
“지금으로부터 10년 전(1915년) 7월에 내가 노국(露國)에 유학하려고 시베리아로 향하였을 때 니콜라스에서 처음 대면하게 된 것입니다. 거의 2년 동안이나 한 집에 붙어 있으면서 많은 지도를 받고 여러 가지로 괴로움을 끼쳤습니다. ..... 보제(이상설) 선생의 천성은 특히 강직하고 강경(剛勁)하기 때문에 내왕하는 청년의 과실만 보면 용서 없이 몰아대는데 이동녕 선생은 그 뒤로 잘 효유(曉喩- 깨닫게 다독임)하고 무마(撫摩-어루만지고 쓰다듬어 줌)하여 그 지방 청년들이 보제는 엄부(嚴父)와 같고 이동녕은 자모(慈母)와 같다고 하였다 합니다. ..... 이동녕 선생은 은근하고도 심중한 태도, 강직하고도 훈후한 성격, 광채 있는 안광(眼光), 우렁찬 음성은 누구에게든지 일면여구(一面如舊-한 번 대했을 뿐이지만, 안 지 오래된 것처럼 친밀함)이 감(感)을 일으키는 동시에 부지중(不知中) 위압을 느끼게 합니다”
한기악의 호는 명오(明五), 월봉(月峰)이다. 강원도 원성 출신으로 조선 말기에 예조판서를 지낸 한돈원의 증손이다. 보성전문학교 법과를 졸업 후 이승복(李昇馥)과 함께 만주로 망명하였다.
3·1독립만세운동 이후 이동녕(李東寧)·이시영(李始榮)·조소앙(趙素昻) 등과 임시정부를 수립하여 임시의정원 의원에 선출되었고, 법무부 위원에 선임되어 입법 활동에 참여했다.
뒷날 귀국해 중앙학교에 근무하다가 『동아일보』 창간 동인으로 참여했다. 동아일보사에 근무하면서 조선청년회연합기성회 발기인으로 참여하였고, 한국청년운동을 위한 핵심 기구를 설치, 운영하는 기초를 닦았다. 조선노동공제회를 조직하고 기관지로 『공제(共濟)』를 발간하면서 한국 청년의 진로 등을 제시하였다.
1924년 7월 동아일보사의 정치부장과 편집국장직을 맡아 글로써 일제의 탄압 일변도의 만행을 규탄하였으며 조선물산장려회 이사로 활약하였다.
1925년 『시대일보(時代日報)』 편집국장을 지냈다. 같은 해 월간 『개벽』 잡지가 항일 민족기사로 인해 조선총독부로부터 정간처분을 당하였을 때, 언론 동지인 송진우(宋鎭禹)·민태원(閔泰瑗)과 같이 사이토[齋藤實] 총독을 찾아가 항변하여 해금시키는 데 성공하였다.
1927년 2월 신간회(新幹會)의 발기인으로 참가하였고 중앙위원에 선출되었다. 1928년부터 4년간 조선일보사의 편집국장으로 재직하면서 민족계몽과 항일투쟁을 독려하는 글을 썼다.
1935년부터 중앙고등보통학교에서 교편을 잡으면서 이 학교의 감사로도 재직하였다. 1941년 사망하여 강원도 원주에 증조부와 함께 모셔져 있다. 1983년에 건국포장, 1990년 애국장이 추서되었다.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참조>
1975년 월봉 한기악 선생 기념 사업회와 출판사 일조각이 힘을 합해 독립운동가이며 문필가인 월봉 한기악 선생의 정신을 기리기 위해 월봉저작상을 제정했다. 이 상은 상해 임시 정부 수립을 기념하여 4월 10일 전후에 열리는데 매년 시상한다. <위키백과 사전>
이러한 월봉 한기악은 이동녕과 동시대의 인물이었으며 이동녕과 함께 임시정부를 수립한 핵심 인물이었다. 그런 사람의 이동녕에 대한 평가는 정확하다고 하지 않을 수 없다.
이동녕은 상해 임시정부를 수립하고 이끈 외유내강(外柔內剛)의 자애로운 어머니와 같은 성품의 인물이었다.
박복연 기자 thanku21c@naver.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