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천안오성고등학교 조영종 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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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천안오성고등학교 조영종 교장 |
저출산과 고령화 시대로 1, 2인 가구 비중이 증가하면서 반려동물을 키우는 가구가 늘어나고 있다. 실제 주변에서 반려견이나 반려묘와 함께 하는 사람들이 많이 늘어나고 있음을 실감할 수 있다. 학생 중에도 돌봐줄 사람이 없다거나 쫓아와서 어쩔 수 없었다며 애완견을 동반해서 등교하는 사례가 종종 있을 정도다.
2019년 농식품부는 반려동물을 키우는 가구는 590만 8,580가구로 인구로는 1,500만 명에 달한다고 추정한 적이 있다. 이는 전체 가구의 26.4%로 4가구 중 1가구꼴로 반려동물을 키우고 있는 셈이다.
그래서 그런지 애완견 놀이터는 물론 애완견 유치원, 애완견 보험에서 애완견 장례식장까지 반려견들을 위한 사업들이 번창하고 있다. 사회가 더욱 도시화되고 바쁘게 돌아갈수록 ‘군중 속의 고독’은 늘어날 테고 그럴수록 반려견을 찾는 사람은 많아질 것이다.
반려견과 함께하는 사람들을 욕되게 하고 싶은 생각은 추호도 없다. 더 하여 반려견은 배신하지 않는다든가, 홀로 사는 사람에게 외로움을 달래준다든가, 서먹서먹한 중년 부부들에게 웃음꽃을 피워준다는 등의 좋은 점에도 동의한다.
한때는 필자도 반려견과 함께 할까 망설였던 적이 있다. 그런데 결론은 반려견을 키우기에는 필자가 매우 게으르다는 생각에 포기하고 말았다. 반려견을 키우려면, 먹이 주기부터 목욕시키기나 대소변 처리, 주기적으로 병원 진료나 예방접종 등 손 가는 일이 한둘이 아니어서 그래서 그들을 사랑할 수 있는 사람들만이 반려견과 함께 할 수 있을 거라는 생각이다.
그도 그런 것이 가끔 주변에서나 보면, 한때는 누군가의 사랑을 받았을 애완견들이 오랫동안 주인의 사랑을 못 받은 모습으로 먹이를 찾아 어슬렁어슬렁 거리는 것을 보게 된다. 이름하여 유기견인 것 같았다. 그 모습을 보면 반려견을 만났으면 끝까지 함께 했으면 좋겠다고 생각하게 된다. 그럴 수 없다면 처음부터 만나지 말았어야 한다.
여기서 개나 고양이가 아닌 사람 반려자를 생각해 본다. 물론 반려자에는 배우자만 있는 게 아니라 친한 친구나 동료도 있을 것이다. 처음에 어떻게 만났던지 서로 마음이 통하여 성경에서처럼 “오래 참고 온유하며 투기하는 자가 되지 아니하며 자랑하지도 교만하지도 아니하며 무례히 행치 아니하며 자기의 유익을 구치 아니하며 성내지 아니하며 악한 것을 생각지 아니하며 불의를 기뻐하지 아니하며 진리와 함께 기뻐하고 모든 것을 바라며 모든 것을 견디느니라”에 가까운 영혼의 반려자가 될 수 있을 것이다.
얼마 전 천안 태조산에 갔을 때의 일이 생각난다. 새봄을 맞아 일가족인 듯한 일행이 따뜻한 양지쪽에 자리를 펴고 둘러앉아 무슨 일인가에 몰두하고 있었다. 가까이 가보니 가족 중 세 사람이 가운데에 강아지를 한 마리 두고 서로 자기에게 오라며 손을 펼치고 있는 장면을 볼 수 있었다. 그때 가족들과 조금 떨어져 앉아있던 어린아이의 표정을 잊을 수가 없다. 식구들이 모두 애완견만을 바라보고 자기와는 놀아주지 않는 것에 화가 났는지 일그러진 표정에 아쉬움을 가득 담고 있는 모습이었다. 반려견에 밀려 사람들이 오히려 소외되는 단면을 본 것 같아서 씁쓸했다.
아무리 반려견과의 동거가 대세고 반려견만큼 우리를 행복하게 해주는 존재가 없다고 외치는 목소리가 높아진다 해도, 필자는 반려견보다는 반려자에게서 정을 느끼고 사랑하며 살기를 바란다. 물론 둘 다 함께한다면 금상첨화겠다. 사람 반려자, 그가 친구였던 동료였든 배우자였든 따뜻한 정을 나누고 외로울 때 달려가 영혼의 벗이 되어줄 누군가라면 좋겠다.
유안진 시인은 ‘지란지교를 꿈꾸며’에서 “저녁을 먹고 나면 허물없이 찾아가 차 한잔을 마시고 싶다고 말할 수 있는 친구가 있었으면 좋겠다”라고 적고 있다. 그런 사람이야말로 진정한 영혼의 반려자 같은 친구가 아니겠는가? 그런 반려자를 가까이하길 권한다.
박복연 기자 thanku21c@naver.com